폭풍의 언덕 — 욕망은 영혼이 아니라 피부에 있다

폭풍의-언덕
출처: Warner Bros.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흙과 빗물과 접촉: 에메랄드 페넬이 브론테의 형이상학을 몸으로 되돌린 방식

영화는 종종 한 장면의 감각으로 기억된다. 바람이 몰아치는 언덕 위, 젖은 풀잎 사이로 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몸을 떨며 숨을 고른다.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손을 바라본다. 손가락 끝에 묻은 흙과 습기, 그리고 욕망의 흔적. 그 순간 뒤에서 다가온 남자가 그 손을 붙잡고 입술로 가져간다. 화면은 잠시 멈춘 듯 보이고, 바람 소리만이 남는다. 이 장면에서 폭풍의 언덕은 스스로를 선언한다. 그것은 고딕 로맨스의 새로운 번역이 아니라, 욕망을 이미지로 환원하려는 어떤 과감한 실험이다.

에메랄드 페넬(Emerald Fennell)이 선택한 방식은 처음부터 명확하다. 그녀는 폭풍의 언덕을 충실하게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해체하고, 몇 개의 정서적 파편—폭풍, 집착, 복수, 그리고 무엇보다 육체적 욕망—만을 남긴 뒤 다시 조립한다. 각색을 둘러싼 오래된 질문은 언제나 무엇이 사라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새롭게 만들어졌는가에 있다. 이 영화가 덧붙인 것은 무엇보다도 신체다. 브론테의 소설에서 암시로만 떠돌던 감정은 여기서 피부와 체액, 숨소리와 촉감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이 선택은 단순한 현대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브론테의 세계에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거의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은 욕망이라기보다 운명에 가깝고, 육체라기보다 영혼의 공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 속 캐서린(Margot Robbie)과 히스클리프(Jacob Elordi)는 처음부터 몸으로 존재한다. 욕망은 말이 아니라 동작으로 드러나고, 사랑은 어떤 철학적 결속이 아니라 반복되는 접촉의 기억으로 축적된다. 카메라는 그 접촉을 거의 집요하게 관찰한다. 흙, 빗물, 피, 그리고 피부. 화면을 채우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물질이다.

이 물질성은 솔트번(Saltburn)에서 이미 등장했던 미학적 집착의 연장선에 있다. 그 영화에서 페넬은 욕망을 계급적 침투의 은유로 사용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액체와 냄새, 점성의 감각으로 번역했다. 욕망은 언제나 무언가를 핥고, 마시고, 흡수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 영화가 귀족적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괴한 식인 의식을 연상시켰다면, 이번 영화는 그 의식을 고딕 낭만주의의 풍경으로 옮겨 놓는다.

문제는 이 과잉된 감각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있다. 페넬의 연출은 언제나 장식적인 과장에 가까운 미장센을 선호한다. 카메라는 인물보다 공간을 강조하고, 공간은 역사적 사실성보다는 시각적 충격을 목표로 디자인된다. 캐서린이 살게 되는 저택의 붉은 바닥과 과장된 드레스, 현실의 시대감과 맞지 않는 광택과 색채는 모두 하나의 선언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세계는 역사적 재현이 아니라 감정의 장식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어떤 기묘한 위치에 놓인다. 그것은 분명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 영화가 아니다. 시대적 맥락은 거의 장식적 배경으로만 남아 있고, 정치적 현실은 완전히 지워져 있다. 남는 것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주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흥미로운 문화적 징후가 된다.

오늘날 극장에서 사랑 그 자체를 중심 서사로 삼는 영화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 영화는 범죄, 스펙터클, 혹은 개인적 트라우마의 서사에는 익숙하지만, 사랑 자체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놓는 데는 점점 더 소극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영화는 낯설 정도로 노골적인 낭만주의를 드러낸다. 그것은 사랑이 사회적 문제와 경쟁하거나 충돌하는 감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오래된 믿음을 되살린다.

이 믿음은 한때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핵심이었다. 예컨대 더글러스 서크(Douglas Sirk)나 존 M. 스탈(John M. Stahl)의 영화에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제약과 충돌하는 비극적 힘이었다. 그들의 영화에서 중산층의 거실은 종종 고대 비극의 무대처럼 보였다. 계급, 인종, 경제적 불평등이 모두 사랑의 서사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동시에 빈센트 미넬리(Vincente Minnelli) 같은 감독은 같은 장르를 또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영화에서 감정은 종종 사회적 갈등의 드라마라기보다 색채와 공간 속에서 번져 나오는 시각적 과잉으로 나타났다. 사랑은 설명되기보다 장식되고, 이야기되기보다 배치된다. 이처럼 멜로드라마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비극의 형식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을 표면과 스타일로 번역하는 영화적 실험이기도 했다.

페넬의 영화는 그 전통을 직접적으로 계승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기억의 잔상처럼 불러낸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사회적 갈등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지워버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관계는 계급의 문제를 암시하지만, 영화는 그 문제를 거의 탐구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을 하나의 절대적 감정으로 고립시킨다.

그 결과 영화의 이미지들은 때때로 놀랍도록 아름답지만, 동시에 공허한 장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면 속 인물들은 거대한 세트와 화려한 의상 속에서 점점 더 인형처럼 보인다. 감정은 강렬하게 표현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맥락은 희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흥미로운 질문을 남긴다. 만약 현대 영화가 다시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어떤 형식으로 가능할까. 과거의 멜로드라마처럼 사회적 현실과 깊이 얽힌 서사일까, 아니면 이 영화처럼 감정 자체를 하나의 순수한 이미지로 만들려는 시도일까.

페넬의 영화는 그 질문에 완전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화면 위에 던져 놓는다. 바람이 부는 언덕, 젖은 풀, 손가락 끝의 흙. 사랑이란 어쩌면 언제나 그처럼 구체적인 감각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가 그 감각을 다시 발견하려는 순간, 오래 사라진 줄 알았던 장르 하나가—로맨스라는 이름의—천천히 돌아올 가능성도 함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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