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셜 매클루언 — 미디어는 메시지다, 지금도

마셜-매클루언-미디어의-이해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형식이 내용을 만드는 방식: 매클루언이 알고리즘 시대를 예언한 이유

유리창에 빗물이 맺히면, 창밖의 세계는 두 번 존재한다. 한 번은 실제로, 한 번은 유리 표면 위에서. 그 두 번째 세계는 첫 번째 세계를 닮았지만 완전히 같지 않다.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형태를 일그러뜨리고, 내부의 빛이 반사되어 층위를 만들고, 시선은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잠깐 망설인다. 마셜 매클루언이 말한 것은 정확히 이것이다. 매체는 세계를 전달하는 투명한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굴절시키고, 층위를 만들고, 시선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장치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오래 망각하며 살아왔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매클루언의 가장 유명한 명제는 단순하다. The medium is the message. 매체가 곧 메시지다. 이 문장은 너무 많이 인용된 나머지 이미 진부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명제가 실제로 말하는 것을 끝까지 따라가본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흔한 오해부터 정리하자. 매클루언은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게 아니다. 그는 내용이 아무리 바뀌어도, 매체의 형식 자체가 인간의 감각과 사유 방식을 먼저 재편한다고 말했다. 전구를 예로 든다. 전구는 아무런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텍스트도 이미지도 없다. 그런데 전구가 세계를 바꿨다. 밤을 낮처럼 만들었고, 밤과 낮의 경계를 흐렸으며, 그 결과 인간이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전구라는 매체의 메시지는 전구가 켜서 비추는 무언가가 아니라, 전구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것을 이해하면, 매클루언의 사유가 얼마나 급진적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인간이 매체를 사용한다는 통념을 뒤집었다. 매체가 인간을 사용한다.


감각의 재편이라는 폭력

매클루언은 매체를 인간 감각 기관의 확장으로 봤다. 바퀴는 발의 확장이고, 책은 눈의 확장이며, 전화는 귀와 목소리의 확장이다. 그런데 확장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하나의 감각이 과도하게 확장되면, 다른 감각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보자. 활자 문화는 시각을 인간의 지배적 감각으로 만들었다. 선형적으로 읽고, 순서대로 사유하고, 논리적 인과를 따라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 이것은 자연스러운 사유의 형식이 아니다. 인쇄 매체가 만들어낸 감각의 형식이다. 그리고 이 형식이 수백 년에 걸쳐 반복되면서, 인간은 그것이 매체의 산물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선형적 사유가 곧 이성적 사유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매클루언이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온 것은 이 맥락에서다. 전자 매체, 특히 텔레비전은 시각 중심의 선형적 감각 구조를 다시 해체했다. 텔레비전은 동시에 여러 감각에 호소하고, 선형적 순서를 교란하며, 정보를 파편으로 전달한다. 이것은 구술 문화의 감각 구조와 닮아 있다. 글자 이전의 인류가 공동체 안에서 동시에 이야기를 나누던 방식. 매클루언은 전자 매체가 인류를 그 원초적 감각 구조로 되돌리고 있다고 봤다. 지구 전체가 하나의 부족 마을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지구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것을 낙관적으로 본 게 아니라는 점이다. 지구촌은 따뜻한 공동체가 아니다. 부족 마을에는 연대도 있지만, 집단적 히스테리도 있다. 정보가 즉각적으로 공유되는 만큼, 공포와 분노도 즉각적으로 전파된다. 매클루언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 — 참여의 구조

매클루언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은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의 구분이다. 이것은 온도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수용자의 참여도와 관련된 분류다.

핫 미디어는 정보의 밀도가 높고 수용자의 참여를 최소화한다. 라디오, 영화, 사진이 여기 해당한다. 이미 충분히 완성된 형태로 도달하기 때문에, 수용자는 해석하거나 보완할 여지가 적다. 반면 쿨 미디어는 정보의 밀도가 낮고 수용자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한다. 전화, 만화, 텔레비전. 불완전하게 전달되는 정보를 수용자가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에, 더 깊이 관여하게 된다.

이 구분에서 흥미로운 역설이 발생한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가 반드시 더 많은 사유를 끌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덜 완성된 매체가 수용자를 더 깊이 끌어들인다. 만화가 영화보다 독자를 더 능동적으로 만드는 이유다. 단순화된 선과 최소한의 정보 안에서, 독자는 캐릭터의 얼굴을 스스로 완성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시간을 스스로 채운다.

이것을 지금의 생태계에 대입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소셜 미디어는 핫 미디어인가, 쿨 미디어인가. 표면적으로는 쿨 미디어처럼 보인다. 참여를 유도하고, 댓글을 요청하며, 공유와 반응을 구조화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 참여는 얼마나 능동적인가.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것, 분노 이모티콘을 선택하는 것, 140자 안에서 반응하는 것. 이것들은 수용자를 능동적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능동성의 형식을 제공하면서 실제 사유를 대체하는가.

매클루언이 이 질문을 직접 던지지는 않았다. 그는 소셜 미디어가 존재하기 전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의 사유를 따라가면 이 질문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마비, 그리고 나르시시즘

매클루언이 말한 개념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은 아마 나르시시즘의 마비일 것이다. 그는 나르키소스 신화를 다르게 읽었다. 나르키소스가 물속에서 본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과 닮은 무언가였다. 그는 그것이 자신임을 알아채지 못했고, 그래서 빠져들었다. 매클루언에게 이 신화는 인간이 자신의 확장물, 즉 매체에 매혹되는 방식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도구를 자신의 일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거기에 몰입한다. 그리고 그 몰입이 깊어질수록 도구에 의해 마비된다. 자동차는 발의 확장이지만, 자동차 문화 속에서 인간의 몸은 걷는 능력을 잃어간다. 계산기는 연산 능력의 확장이지만, 계산기 없이는 간단한 암산도 불편해진다. 매체는 능력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그 능력의 자율성을 잠식한다.

지금 이 순간, 이 역학이 가장 선명하게 작동하는 곳은 언어다. 검색은 기억의 확장이다. 그런데 검색이 보편화되면서 기억하려는 동기 자체가 약해진다. 알고리즘은 판단의 확장이다. 그런데 알고리즘이 무엇을 볼지 결정해주면서, 무엇을 볼지 스스로 선택하는 근육이 위축된다. 추천 시스템은 취향의 확장이다. 그런데 추천된 취향을 소비하다 보면 취향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가 사라진다.

이것은 기술 혐오가 아니다. 매클루언 자신도 기술 혐오자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이 역학을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 거대한 차이가 있다고 봤다. 의식하는 인간은 매체를 사용한다.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은 매체에 의해 사용된다.


지금 여기서 매클루언을 읽는다는 것

매클루언이 죽고 반세기가 지났다. 그 사이에 인터넷이 생겼고, 스마트폰이 생겼고, 소셜 미디어가 생겼으며, 이제는 생성형 AI가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의 이론이 이 변화들을 예측했다고 말하면 과장이다. 하지만 그의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고, 어쩌면 그때보다 더 긴박하게 유효하다.

매체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감각을 재편하고 있는가. 스크롤이라는 동작이 사유의 형식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가. 알림이라는 구조가 집중의 방식을 어떻게 분해하는가. 이미지가 텍스트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진 생태계에서, 언어적 사유는 어떤 방향으로 변형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매클루언이 던진 질문들의 현재 버전이다. 그리고 이 질문들을 진지하게 던지는 행위 자체가, 매체에 의해 사용되기를 거부하는 첫 번째 몸짓이다.

유리창에 빗물이 맺혀 있다. 그 너머의 세계는 이미 굴절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굴절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굴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는 것, 그리고 그 굴절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것. 매클루언이 남긴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아직 낡지 않았다.

— 이론적 확장: 미디어에서 문화로

매클루언의 환경론에서 젠킨스의 참여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