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원인과 역사 — 예루살렘, 세 종교의 전쟁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에는 단순한 영토 문제를 넘어선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
이 갈등은 정치와 종교,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수천 년에 걸친 기억의 충돌 속에서 태어났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예루살렘—세 종교의 신앙이 교차한 도시—가 있다.

핵심 요약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 원인

예루살렘 분쟁을 상징하는 황금 돔과 성전산 이미지
예루살렘 성전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자리에 교차한 곳
  • 핵심 요약: 예루살렘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성지로, 세 종교가 신의 약속을 주장하며 갈등이 시작되었다.
  • 분쟁의 뿌리:
    • 유대교는 다윗왕과 솔로몬 성전의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본다.
    • 기독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구원의 땅’으로 여긴다.
    •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승천한 ‘하늘의 문’이라 믿는다.
  • 역사적 전환점:
    • 오스만 제국 통치 시기의 평온
    • 영국의 밸푸어 선언으로 인한 이중 약속
    •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대재앙(나크바)
    • 1967년 6일 전쟁 이후 예루살렘 완전 점령
    • 2000년 알 아크사 인티파다와 2023년 가자전쟁
  • 오늘날의 의미: 종교 갈등을 넘어선 ‘정체성과 생존의 싸움’.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 속에서 인류는 ‘공존의 지혜’를 시험받고 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원인: 예루살렘은 왜 세 종교의 전쟁터가 되었나

예루살렘.
수천 년 동안 이 도시는 신의 언어로 쓰인 약속이자, 인간의 언어로 새겨진 상처였다.

처음 이곳을 마주한 사람들은 이 땅을 “하느님의 선물”이라 불렀다.
하지만 지금, 많은 이들이 그것을 “신의 저주”라 부른다.
그 사이에는 불과 몇 천 년이 흘렀을 뿐이다.

물이 귀하고, 흙은 척박하다.
농사는 어렵지만, 방어에는 유리한 지형.
삶을 일구기엔 가혹한 땅이었으나, 신앙을 세우기엔 충분히 극적이었다.

유일신을 믿는 세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이 도시에 자기 신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축복이었을까, 아니면 파멸의 서막이었을까.

유대교의 기원 — 다윗왕과 솔로몬 성전의 붕괴

기원전 10세기경, 다윗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솔로몬이 첫 성전을 세웠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에게 이곳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었다.

그러나 그 성전은 두 번 무너졌다.
기원전 586년 바빌론, 그리고 서기 70년 로마.
유대인들은 세계로 흩어졌고, 남은 것은 단 한 줄기 벽이었다.
그 벽 앞에서 사람들은 울었다.
그것이 지금의 ‘통곡의 벽’이다—무너진 시간과 꺾인 신앙의 돌벽.

기독교의 탄생과 예루살렘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의 죽음은 신의 사랑을 증명하려는 행위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종교—기독교—의 시작이었다.

이후 예루살렘은 기독교 순례자들의 성지가 되었고,
성묘교회는 그들의 신앙과 고통, 구원의 서사를 품었다.
그곳에서 울리는 찬송은 신앙이라기보다, 인간의 슬픔에 가까웠다.

이슬람의 무함마드와 알 아크사 사원

이슬람 신앙 속에서도 예루살렘은 특별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하늘로 올랐다고 전해진다.
그 자리에 세워진 황금빛 돔의 바위 사원과 알아크사 사원은
이 도시를 메카, 메디나와 함께 이슬람의 세 번째 성지로 만들었다.

이로써 한 도시 안에 세 종교의 가장 거룩한 장소가 공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단어는 언제나 인간보다 신에게만 가능했다.

오스만 제국의 예루살렘 통치

1516년부터 400년간, 오스만 제국이 예루살렘을 다스렸다.
그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평온했다.
각 종교는 서로의 구역을 지키며, 충돌 대신 침묵을 택했다.
침묵은 평화를 가장한 거리두기였다.
그리고 그 거리두기는, 곧 새로운 폭풍의 전조였다.

밸푸어 선언 — 팔레스타인 비극의 씨앗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무너졌다.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하면서, 역사는 기묘한 이중 약속을 남겼다.
1917년 ‘밸푸어 선언’—영국은 유대인에게 “민족의 고향”을 약속했고,
동시에 아랍인들에게는 “독립”을 암시했다.

하나의 땅에 두 개의 미래가 심어졌다.
그 씨앗은 곧 피로 자랐다.

이스라엘 독립과 팔레스타인 나크바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이후 국제 여론은 그들의 건국을 지지했다.
1948년,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삶의 터전 위에 낯선 깃발이 세워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날 이후, 수십만 명이 집을 잃었다.
이 사건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금도 ‘나크바’—대재앙이라 부른다.

팔레스타인의 분열 — 파타와 하마스

상실은 외부에서만 오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분열이 자라났다.

하나는 ‘파타(Fatah)’.
협상을 믿고 외교를 꿈꾼 세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하마스(Hamas)’.
1987년 인티파다(봉기) 속에서 등장한 무장조직으로,
그들은 폭력 속에서 정의를 증명하려 했다.

2006년 총선에서 하마스가 승리하자, 팔레스타인은 갈라졌다.
서안에는 파타, 가자에는 하마스.
국경선은 그대로였지만, 마음속의 경계는 더 깊어졌다.
이제 싸움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아니라,
‘누가 더 진정한 팔레스타인인가’라는 내면의 전쟁이 되었다.

6일 전쟁과 동예루살렘 점령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를 장악했다.
유대인들은 “2천 년 만에 성지를 되찾았다”고 외쳤지만,
팔레스타인과 아랍 세계는 그것을 “점령”이라 불렀다.
두 단어 사이의 의미 차이가, 다시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성전산(하람 알샤리프)—
유대교에겐 솔로몬 성전의 자리,
이슬람에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
이 작은 고원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분화구가 되었다.

알 아크사 인티파다와 21세기 분쟁

2000년, 아리엘 샤론의 성전산 방문은 ‘알 아크사 인티파다’를 불러왔다.
그 봉기는 다섯 해 동안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삼켰다.
이 시기, 종교는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상대방을 부정하기 위한 명분’이 되어버렸다.

예루살렘 현대사 — 수도 논쟁과 하마스 전쟁

2017년, 미국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했다.
국제사회는 긴장했고, 팔레스타인과 이슬람권은 분노했다.
유대 극우 세력의 성전산 진입, 하마스의 미사일,
그리고 가자지구를 향한 공습.
불길은 다시 올랐다.

2023년 10월, 하마스의 기습 공격 이후
가자지구는 초토화되었다.
도시가 무너지는 동안, 사람들은 신을 불렀지만
이번에도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의 침묵과 인간의 책임

예루살렘은 한 민족에게는 ‘약속의 땅’,
다른 민족에게는 ‘빼앗긴 삶의 시작’이다.
두 진실은 모두 강렬하고, 모두 옳고, 모두 아프다.

이 분쟁은 단순한 영토 다툼이 아니다.
정체성과 기억, 신앙과 해석,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흐려진 복합적 충돌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신이 있다.
하지만 이제, 이 싸움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정의’라는 이름의 복수가 아니라,
‘공존’이라는 이름의 지혜다.
신이 시험한 것이 믿음이었다면,
우리가 증명해야 할 것은 인간됨일 것이다.

결론 — 신의 선물과 인간의 선택

예루살렘은 여전히 뜨겁다.
하지만 그 뜨거움은 신의 불꽃이 아니라, 인간의 분노에서 피어난 열기다.
언젠가 이 땅이 다시 ‘신의 선물’이라 불리려면,
먼저 인간이 서로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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