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조선 역사상 대표적 폭군으로 기록. 중국 고대 걸·주 임금에 비유됨.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과 사화로 인한 정치적 폭력성이 그의 이미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침.
이미지:사치와 연희를 즐겨 ‘흥청망청’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으며,
방탕과 폭정의 대명사로 대중문화 속에서도 자주 등장.
폐위: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강제 퇴위
최후: 강화도 교동 유배 중 병사, 향년 31세
묘호·능호: 없음 (왕으로서의 정통성 부정)
그는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었다. 한 소년의 결핍은 세월을 거쳐 제국의 균열로 번졌다. 연산군의 이름은 지금도 ‘폭군’으로 남아 있지만, 그 그림자 속에는 상처받은 인간의 초상이 희미하게 겹쳐져 있다.
연산군, 어머니의 상처와 무오사화·갑자사화가 남긴 비극적 최후
조선의 군주 가운데 ‘폭군’이라는 이름과 가장 짙게 겹쳐지는 인물은 연산군이다. 그러나 그를 단순한 광인으로만 부르는 것은, 그의 삶을 둘러싼 복잡한 맥락을 지나쳐 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가 걸어간 길에는 궁궐이라는 좁은 세계에 축적된 상처, 모순적인 권력 구조, 그리고 시대가 만든 비극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의 시작은 아이러니였다. 왕위 계승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적장자로 태어났으나, 그 어린 생애를 잠식한 것은 모성의 부재였다. 그의 어머니, 윤씨는 한때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질투와 정치적 갈등 속에서 폐위되고 독살당했다. 문제는 어린 연산군에게 그 사실이 끝내 감춰졌다는 것이다. 계모 정현왕후의 품에서 자라며 그는 어머니의 존재를 공백처럼 껴안고 성장했다. 그 결핍은 훗날 무서운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어머니가 억울하게 사라졌다는 진실을 들은 순간, 그의 왕좌는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상실을 되찾고 복수할 무대로 변해버렸다.
그의 분노는 곧 사화(士禍)라는 피의 정치를 불러왔다. 1498년,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이 발단이 된 무오사화에서 수많은 사림이 처형되었다. 세조의 찬탈을 비판한 그 글은, 연산군의 눈에 조부를 모욕하는 반역의 증거였다.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김종직조차 무덤에서 끌려 나와 부관참시를 당했다. 정치의 새 주역으로 막 떠오르던 사림은 그 자리에서 무참히 꺾였다.
그러나 진정한 폭풍은 1504년에 몰아쳤다. 술자리에서 흘러나온 말, “어머니 윤씨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문은 연산군의 내면을 뒤흔들었다. 그는 어머니를 모함했던 후궁들을 불러내 잔혹한 방식으로 죽였고, 대신과 신하들, 수백 명을 도륙하거나 유배 보냈다. 갑자사화라 불린 이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숙청이 아니라, 한 인간이 광기에 휩쓸려 펼친 사적 복수극이었다.
이후 그의 통치는 두 얼굴을 가졌다. 하나는 공포였다. 새로운 형벌을 고안하며 반대파를 잔인하게 처벌했고, 이미 죽은 자에게조차 죄를 덧씌워 무덤을 파헤쳤다. 다른 하나는 향락이었다. 궁궐에 연못과 섬을 만들고, 기생과 환락을 불러들였다. 권력은 점차 국가의 근간을 소모하는 기계처럼 돌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1506년, 그 기계는 멈추었다. 신하들과 군사들은 그를 버렸고,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강화도로 유배된 그는 왕이라는 이름조차 지우고 생을 마감했다. 조선의 기록에서 그는 끝내 ‘왕’이 아닌 ‘군(君)’으로 남았다.
연산군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는 분명 폭군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시대와 구조가 만든 비극의 화신이기도 했다. 모성을 빼앗긴 소년, 불안정한 권력 질서, 권신들의 부추김 속에서 그는 파괴된 인간으로 성장했고, 그 파괴는 곧 조선의 심장을 후벼팠다. 그를 단순히 악인으로만 남긴다면, 역사가 반복해온 권력의 비극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연산군의 이야기는, 권력이 개인의 상처와 만날 때 어떻게 폭력이 되어 터져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