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 부관참시와 압구정의 역사적 의미 – 《왕과 사는 남자》의 역사 고증

QUICK ANSWER

한명회(韓明澮, 1415–1487)

① 조선 전기 권력의 핵심 인물

한명회는 조선 전기 최고의 권력가로, 세조의 왕위 찬탈(계유정난, 1453)을 설계하고 실행한 핵심 공신이었다. 그는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네 차례 1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모두 지낸 최고 권력자였다. 그의 두 딸은 각각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와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가 되었고, 이를 통해 그는 왕의 장인이자 왕실 권력 구조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② 사후 처벌과 부관참시

그는 1487년 성종 18년에 사망하여 처음에는 최고의 예우로 장례되었으나, 1504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정치 세력을 숙청하면서, 이미 사망한 한명회를 반역 관련 인물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가 시행되었고, 관작이 삭탈되며 가문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③ 중종반정 이후 복권과 역사적 평가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정치적 평가가 다시 바뀌면서, 그의 관직과 명예는 복권되었다. 이는 한명회라는 인물이 단순한 간신이나 충신으로 규정될 수 없는, 조선 권력 구조의 중심에서 시대의 방향을 결정했던 핵심 정치가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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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 초상(이미지 구현)
조선의 권신 한명회 부관참시와 압구정, 그리고 왕과 사는 남자

역사 속 한명회 부관참시와 압구정, ‘왕과 사는 남자’의 역사 고증

영화는 종종 역사를 왜곡한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순간은, 영화가 오히려 후대의 왜곡을 건드릴 때다.

최근 영화 속에서 묘사된 한명회는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려온 간신의 얼굴과는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그 장면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실록과 후대 기록 속 한명회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왜소한 간신인가, 압도적인 권력자인가 — 기록 속 한명회의 실제 모습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한명회는 음험하고 교활한 책략가다. 어린 왕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전형적인 간신의 얼굴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상당 부분 후대의 정치적 평가와 문학적 재구성 위에서 굳어진 것이다.

실제로 한명회가 사망했을 때 사관이 남긴 『성종실록』의 졸기에는 전혀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권세가 매우 성하여 따르며 아부하는 자가 많았고, 손님들이 문에 가득하였다. …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 토지와 금은보화가 그 집에 잇달았다.”
— 성종실록, 1487년

이 기록은 도덕적 비판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그는 조정에서 배제된 인물이 아니라, 권력의 중심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

한명회는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까지, 무려 네 차례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이는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극히 드문 사례다. 그는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냈고, 두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의 왕비로 들였다. 왕의 장인이자, 왕위 계승 구조의 내부에 직접 연결된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을 “조종한” 사람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된 사람이었다.

변방의 미미한 관리에서, 왕을 만든 설계자가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런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한명회는 개성에서 경덕궁직을 맡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하급 관리였다. 『연려실기술』과 여러 야사에는 그가 동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던 일화가 전한다. 만월대에서 열린 모임에 참여하려다 거절당했다는 기록은, 그의 초기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수양대군과의 만남에서 바뀐다.

당시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약화되어 있었고, 수양대군은 권력 장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한명회는 친구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에게 접근했고, 그의 책략은 곧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수양대군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대야말로 나의 자방(子房)이다.”

자방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책사 장량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권력 설계자로서의 공식적인 인정이었다.

1453년,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그의 위치는 완전히 달라진다.
단종은 권력을 잃었고, 수양대군은 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왕을 만든 설계자의 이름이 바로 한명회였다.

그는 단종을 제거한 인물이 아니라, 단종 이후의 세계를 만든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명회를 단종의 비극과 직접 연결된 인물로 기억한다. 그것은 틀린 인식은 아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따로 있다.

그는 단종을 단순히 제거한 인물이 아니라,
단종 이후의 질서를 구축한 인물이었다.

세조 즉위 이후에도 그는 단순한 공신으로 머물지 않았다. 사육신 사건을 비롯해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 깊이 관여했고, 이후 예종과 성종 대까지 권력의 핵심에 남아 있었다.

특히 그의 딸이 성종의 왕비가 되면서, 그는 단순한 신하를 넘어 왕실 내부의 구성원이 된다.

권력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권력을 떠날 때까지는.

압구정 — 권력의 정점에 선 사람이 선택한 마지막 상징

1476년, 그는 한강변에 정자를 세웠다. 이름은 압구정(狎鷗亭),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었다.

이 이름은 명나라 사신 예겸이 지어준 것이었고, 성종은 직접 시까지 지어 이를 기념했다. 그러나 이 정자는 곧 정치적 논란의 중심이 된다.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권위를 과시한다는 비판이 이어졌고, 결국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갈매기와 벗하겠다는 이름은, 역설적으로 권력의 끝을 예고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는 1487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만든 권력 구조는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조선을 지배했다.

부관참시 —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은 권력

그러나 17년 뒤, 그는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소환된다.

1504년, 갑자사화 가 일어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과, 선왕 대의 권력 핵심을 이루었던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한명회 역시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의 무덤은 파헤쳐졌고, 부관참시가 시행되었다.

부관참시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생애 전체를 부정하고, 그의 정치적 존재 자체를 역사에서 지우려는 선언이다. 죽음 이후에 내려지는 이 형벌은,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처벌이다.

그러나 이 처벌은 또 다른 사실을 드러낸다.

죽은 지 17년이 지난 인물을 다시 처벌해야 할 만큼, 그의 이름은 여전히 권력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권력이 바뀌자, 평가 역시 바뀌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갑자사화의 처벌은 재검토되었다. 한명회 역시 복권되었고, 그의 관직과 공신으로서의 지위는 다시 회복되었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의 생애가 아니라 권력의 흐름 속에서 다시 쓰였다.

그의 삶은 한 번 끝났지만,
그의 정치적 존재는 두 번 죽고, 다시 살아났다.

우리가 알고 있던 한명회와, 실제 기록 속 한명회 사이의 거리

인터뷰에서 장항준 감독이 언급한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당대 기록 속 한명회는, 단순한 간신의 이미지로 환원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권력에서 밀려나 비극적으로 사라진 인물이 아니라, 왕조의 핵심에서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했던 대신이었다. 동시에 그는, 권력이 바뀌자 사후에까지 처벌되었다가 다시 복권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존재는 단순한 선악의 구도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왜소한 음모가가 아니라,
왕을 만들고, 왕조의 권력 구조 안에서 살아갔으며,
죽은 뒤에도 정치의 중심에 남아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존재 앞에서 단종은 비극의 중심에 놓인 왕이었고, 엄흥도는 그 비극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가 아니라
권력, 충성, 그리고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다시 쓰이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가 상상력으로 그 틈을 채웠다면,
실록은 그 틈이 권력의 흐름 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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