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머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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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arner Bros.
폴 토머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리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리뷰

영화에는 늘 시간이 있다.
인물들이 살아가는 시간, 사건이 밀려오는 시간, 그리고 한 시대가 다른 시대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시간. 어떤 영화는 그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내고, 어떤 영화는 그 흐름을 멈추어 응시한다. 그러나 드물게, 아주 드물게 어떤 영화는 시간 자체를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바로 그런 영화다.

여기서 시간은 단일한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어떤 몸은 이미 늦어졌고, 어떤 몸은 아직도 달리고 있으며, 어떤 몸은 그 사이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는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이 어긋난 시간들을 추격극이라는 가장 단순한 장르 형식 속에 밀어 넣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질주는 단순한 스펙터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 몸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리듬이 된다.

이제는 속도만으로 관객을 압도하기 어려운 시대다. 더 빠르게 달리고, 더 크게 터뜨리고, 더 요란하게 몰아치는 일은 이미 너무 오래 반복되었다. 그래서 동시대 영화가 제 존재를 갱신하는 방식은 오히려 느림에 있다고, 멈춤과 응시와 침묵의 복원에 있다고 쉽게 믿게 된다. 그런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반대편에서 온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여기서 속도를 낡은 장르의 잔재로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쓴다. 질주는 더 이상 구경거리가 아니라, 역사와 몸과 감정이 서로 충돌하는 방식이 된다.

이 영화의 운동은 단순히 빠르지 않다. 불균질하다. 누군가는 전력으로 뛰고, 누군가는 허둥대며 뒤쫓고, 누군가는 이미 한참 늦은 몸으로 그 리듬에 간신히 편승한다. 그 들쭉날쭉한 박자 속에서 영화는 한 남자의 구출극을 넘어, 끝난 줄 알았던 혁명의 잔향이 오늘의 미국에서 어떤 소음으로 되돌아오는지를 묻는다. 총성과 추격, 폭력과 코미디가 한 화면에서 번갈아 튀는 동안 정작 오래 남는 것은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시대에 뒤처진 몸들이 아직도 싸움의 자세를 버리지 못한 채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밥 퍼거슨은 전형적인 영웅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인물이다. 한때는 세계를 바꾸겠다고 믿었을지 모르나, 지금의 그는 휴대폰 충전과 호흡 조절부터 걱정해야 하는 중년에 가깝다. 몸은 늦고 기억은 닳았으며, 과거의 언어는 입안에서 자꾸 헛돈다. 이 영화가 탁월한 것은 바로 그 낡음과 우스꽝스러움을 인물의 결함으로만 처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혁명의 실패를 비장하게 기념하지도, 냉소적으로 폐기하지도 않는다. 대신 한 세대의 이상이 어떻게 생활의 피로와 섞여버렸는지, 그리고 그 피로 속에서도 끝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본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정치는 구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늘 몸의 문제로 내려온다. 누가 어디로 뛰는지, 누구의 숨이 먼저 차오르는지, 누가 좁은 복도와 계단과 차 안에서 먼저 중심을 잃는지 같은 것들. 화면 안의 인물들은 세상을 통과한다기보다 세상에 부딪히며 전진한다. 세계는 그들에게 배경이 아니라 마찰면이다. 이 마찰이야말로 영화의 속도를 실제 감각으로 바꾸는 핵심이다. 속도는 여기서 추상적인 박진감이 아니라, 세계가 사람을 쉽게 통과시켜주지 않을 때 생기는 물리적 긴장으로 감각된다.

그 점에서 숀 펜이 연기하는 적대자는 단순한 악역 이상의 기능을 가진다. 그는 권력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한 몸에 끌어안은 채 등장한다. 위협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럽고, 우스꽝스럽지만 그렇다고 조금도 무해해지지 않는다.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의 오래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폭력과 희극을 서로 반대편에 놓지 않는다는 데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스운 순간은 긴장을 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물의 비참함과 세계의 비틀린 규칙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배치된다. 웃다가도 곧바로 불안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베니시오 델 토로는 그 거친 리듬 사이에서 영화의 숨을 다시 고른다. 모두가 앞으로 쏠리고 밀리고 미끄러지는 동안, 그는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느긋함은 영화의 속도를 죽이지 않는다. 반대로 그 박자의 차이 때문에 전체 리듬은 더 풍부해진다. 급박한 추격 한가운데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자기 몸의 리듬을 잃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 사실이 이 영화의 세계를 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혁명이란 언제나 전속력의 돌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듯이.

영화의 핵심은 결국 제목이 가리키는 바에 있다. One Battle After Another.
전투 다음의 전투, 끝 다음의 다음. 이 말은 단순히 싸움이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싸움은 형태를 바꾸며 살아남는다. 거리의 급진성은 생활의 생존술로 옮겨가고, 과거의 실패는 다음 세대의 감각 속에서 다른 이름을 얻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다음 사람에게 건네지는가다. 신념일 수도 있고, 상처일 수도 있고, 실패의 방식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오래된 암호 하나와 믿음의 타이밍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결말이 남기는 감정은 통쾌함보다는 이행에 가깝다. 이 영화는 승리의 포즈보다 바통을 건네는 손의 모양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진다. 한 세대가 모든 것을 완수하지 못했더라도, 그 미완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것. 늙고 실패하고 우스워진 사람들조차 다음 사람에게 무언가를 넘겨줄 수 있다는 것. 영화는 그 사실을 거창한 선언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의 움직임, 멈춤, 거리, 타이밍 속에 스며들게 한다. 그래서 감정은 늦게 오고, 대신 오래 남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정치적 영화이면서도 결코 추상으로 도망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국의 오래된 폭력, 권력의 계보, 백인 중심 질서, 이민과 배제의 문제는 분명히 이 영화의 뼈대를 이룬다. 그러나 폴 토머스 앤더슨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그런 더러운 유산을 고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아는 감독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 유산이 오늘의 몸들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다음 세대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끊거나 변형하거나 떠안게 되는가다. 이 영화가 진짜로 묻는 것은 혁명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실패 이후에도 무엇이 계속 움직이는가이다.

그러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단순한 범죄 액션 스릴러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품고 있고, 반대로 무겁고 난해한 정치 비평극으로만 부르기에는 너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이 영화는 웃기고, 허둥대고, 거칠고, 위험하다. 동시에 묘하게 다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내 사람을 믿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이미 많은 것을 망친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건네줄 수 있다고 믿는 영화다. 그 믿음이야말로 이 작품이 끝난 뒤에도 가장 오래 잔향처럼 남는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여기서 혁명을 승리의 언어로 복원하지 않는다.
대신 혁명을 리듬의 언어로 다시 쓴다.
한 사람의 시대가 저물고, 다른 사람의 시간이 시작되는 그 미세한 박자 이동.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바로 그 순간을 붙잡음으로써, 끝난 줄 알았던 싸움이 사실은 다른 몸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감독 — 폴 토머스 앤더슨

폴 토머스 앤더슨은 197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동시대 영화에서 가장 독자적인 리듬을 구축해온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인물의 감정보다 한 박자 어긋난 세계, 그리고 그 어긋남 속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집요하게 포착해왔다.

초기작인 부기 나이트매그놀리아에서 집단과 시대의 흐름을 다루던 그는, 데어 윌 비 블러드마스터를 거치며 권력과 신념,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몸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더 깊이 탐구했다. 이후 팬텀 스레드리코리쉬 피자에서는 관계와 시간의 미묘한 균열을 보다 섬세한 리듬으로 풀어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의 작업이 다시 한 번 확장된 지점에 놓인다. 여기서 그는 이전처럼 인물을 해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서로 다른 시간에 속한 몸들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리듬 자체를 영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린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폴 토머스 앤더슨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가장 노골적으로 ‘시간의 불일치’를 전면에 드러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 에디터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