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니파와 시아파
수니파와 시아파 (Sunni & Shia)

- 기원: 무함마드 사후(632년), 후계자 문제에서 비롯된 분열
- 결정적 계기: 680년 카르발라 전투 이후 양측의 분리 확정
- 인구 비중: 수니파 약 85%, 시아파 약 15%
- 주요 지역: 수니파 —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집트, UAE / 시아파 — 이란, 이라크, 레바논, 바레인
① 수니파 (Sunni) — 전통과 합의의 종교
수니파는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뜻을 이어가야 한다면 그 길은 ‘공동체의 합의’ 안에 있다고 믿었다.
예언자의 가르침인 Sunnah(순나)와 신앙 공동체의 합의 Ijma(이즈마)를 신앙의 근본으로 삼았고,
네 명의 정통 칼리프를 정당한 후계자로 인정하며 질서와 연속을 중시했다.
그들에게 신앙이란 변화보다 일치, 해석보다 전통에 가까웠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이집트 등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이 노선을 따르고 있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 일부 극단주의 단체(IS 등)는 이 교리를 왜곡해 폭력과 배타로 변질시키며,
본래의 수니적 정신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② 시아파 (Shia) — 혈통과 순교의 신앙
시아파의 신앙은 피와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Ali)를 정당한 후계자로 믿으며,
신의 뜻은 혈통을 통해 이어진다고 여긴다.
알리와 그 후손인 ‘이맘(Imam)’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신의 계시와 정의를 지탱하는 영적 축으로 여겨졌다.
특히 680년 카르발라에서 알리의 아들 후세인(Husayn)이 순교한 사건은 시아파의 정체성을 완성시킨 비극이었다.
매년 ‘아슈라(Ashura)’ 의식에서 그들은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고통 속에서도 진리를 지킨 신념을 되새긴다.
시아파의 신앙은 복종보다 저항, 침묵보다 증언에 가깝다.
③ 종파 갈등의 현대적 그림자
- 역사적 분열: 종교 해석과 정치 권위의 정당성 문제에서 비롯
- 정치적 축: 사우디(수니파 종주국)와 이란(시아파 종주국)의 지역 패권 경쟁
- 중동 내 균열: 이라크·시리아 내 종파 대립, 예멘 내전, 레바논의 헤즈볼라 충돌 등에서 재현
④ 수니파 시아파 차이 요약 비교
아래 표는 두 종파의 교리적, 정치적 차이를 간결히 정리한 것이다.
구분 | 수니파 | 시아파 |
---|---|---|
후계자 기준 | 공동체 합의 (칼리프 체제) | 무함마드의 혈통 (알리 후손 중심) |
신학적 중심 | 전통과 합의 (Sunnah & Ijma) | 이맘의 영적 권위와 순교의 정신 |
주요 지역 | 사우디, 터키, 이집트, UAE | 이란, 이라크, 레바논, 바레인 |
인구 비중 | 약 85% | 약 15% |
사막의 새벽은 언제나 고요하다.
모래바람이 잦아들면, 인간의 목소리가 그 고요를 깨운다. 7세기 아라비아 반도, 한 남자의 이름이 새겨진다 — 무함마드.
그는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었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던 신의 언어를 세상에 다시 불러내고, 부족의 시대를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 ‘움마(Ummah)’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순간, 신의 언어는 다시 인간의 언어로 찢어졌다.
신앙은 하나였으나, 권력은 둘이었다 —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무함마드의 죽음(632년) 이후, 사람들은 물었다.
“누가 그의 뒤를 이을 것인가?”
이 단순한 질문은 천년의 분열을 불러왔다.
한쪽은 믿었다 — “예언자의 후계자는 공동체가 합의로 정해야 한다.”
그들이 바로 수니파(Sunni)였다. 신앙은 집단의 합의, 곧 ‘순나(Sunnah)’ — 예언자의 전통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다른 한쪽은 달랐다 — “예언자의 혈통만이 신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다.”
그들이 바로 시아파(Shia)였다.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Ali)를 정통 후계자로 보는 흐름이었다.
그들에게 신앙은 단순한 제도나 정치가 아니라, 피와 영혼의 계승이었다.
결국, 첫 번째 분열은 신의 대리자를 인간이 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그 갈등은 곧 신앙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더 깊은 문제로 이어졌다.
알리의 피, 그리고 카르발라 전투
657년, 시리아의 무아위야와 알리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누가 신의 뜻을 더 잘 이해했는가’를 묻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불씨는 680년, 이라크의 카르발라(Karbala)에서 비극으로 번진다.
알리의 아들, 후세인(Husayn).
그는 72명의 추종자와 함께 수천의 병사에 맞섰다.
그 싸움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그러나 후세인의 죽음은 시아파의 심장에 ‘저항’이라는 단어를 새겼다.
그들은 그 피를 잊지 않았다. 매년 아슈라(Ashura) 축일이 오면, 시아파는 후세인의 순교를 애도하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한다.
그 행위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에 남은 상처를 잊지 않겠다는, 신 앞에서의 맹세다.
수니파에게 신앙은 질서와 전통의 유지였다면,
시아파에게 신앙은 고통 속에서도 정의를 붙드는 행위였다.
하나는 ‘안정의 종교’, 다른 하나는 ‘항거의 종교’로 성장했다.
역사는 여전히 수니파와 시아파를 재판한다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의 약 85%는 수니파, 15%는 시아파다.
지도 위로 보면 단순한 통계일 뿐이지만, 그 수치는 중동의 모든 분쟁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
이라크의 권력, 이란의 신정, 시리아의 내전, 예멘의 전쟁까지 —
그 모든 갈등의 밑바닥에는 “누가 신의 뜻을 더 진실하게 따르고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여전히 숨 쉬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종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슬람의 분열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도자를 잃은 공동체는 언제나 새로운 권위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신의 이름은 종종 인간의 욕망을 덮는 가면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수니와 시아는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똑같은 하늘을 향해 기도한다.
“알라후 아크바르(Allah-u Akbar).”
신은 위대하시다.
그 문장은 두 종파 모두의 입에서 동일하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보는 신의 얼굴은, 서로 조금씩 다르다.
끝나지 않은 질문 — 이슬람 갈등의 현재
수니와 시아의 분열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진리’를 어떻게 믿고, ‘권위’를 어디서 찾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다.
그리고 아마 그 물음은, 종교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사막의 바람은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분다.
그 바람 아래에서, 사람들은 다른 언어로 같은 신을 부른다.
그리고 어쩌면 — 그 차이가야말로 인간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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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분열이 종교 내부에서 시작됐다면, 정치적 균열은 국경 밖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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