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즈음에 — 나는 죽음이 무섭다
나는 죽음이 무섭다. 이 문장을 이렇게 곧장 쓰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마흔을 넘기고 나서야 이 말은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 되었다. 젊을 때의 두려움이 막연한 상상이었다면, 지금의 두려움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름을 알고, 목소리를 알고, 매일 안부를 묻는 얼굴들이다.
우리 집은 세 사람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가족의 수가 적다는 사실은 한동안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단출함은 안정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숫자는 계산이 되기 시작한다. 한 명이 빠지면 둘, 둘이 빠지면 하나. 이 단순한 산수가 갑자기 삶의 구조를 위협한다.
부모님은 예전보다 천천히 움직인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약 봉투가 늘어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시간을 본다. 그들의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나의 시간도 함께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죽음은 그제야 ‘언젠가’가 아니라 ‘가까이’가 된다.
효도를 많이 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두려움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더 잘해드릴 수 있었던 순간들, 괜히 미뤘던 전화 한 통, 바쁘다는 이유로 넘긴 주말. 그것들은 죄책감이 아니라 미완의 감정으로 남아 있다.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그 감정들이 정리될 시간을 더 이상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마흔의 나이는 애매하다. 세상은 이미 어른이라고 부르지만, 마음은 여전히 준비 중이다. 책임은 늘었고, 선택의 폭은 좁아졌다. 그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겁이 많다.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밤이 깊어질수록 더 선명해진다. 집 안의 정적이, 미래의 예고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두려움은 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연결의 증거다. 누군가를 잃는 것이 무섭다는 것은, 이미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두렵지 않다면, 아무도 소중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 두려움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간다움에 가깝다.
나는 아직 많은 것을 해내지 못했다. 부모에게 충분히 돌려주지도 못했고, 스스로를 완전히 단단하게 만들지도 못했다. 그래서 더 무섭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작별을 맞이하게 될까 봐. 그러나 이 두려움은 동시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지금 더 말하라는 것, 지금 더 묻고, 더 함께 있으라는 것.
마흔이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무섭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죽음은 조금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나를 멈추게 하는 공포가 아니라, 지금의 시간을 더 진하게 만들라는 요청처럼.
이 마음을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이 마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 너무 늦은 것도 아니라는 것. 죽음이 무섭다는 고백은, 아직 삶을 놓지 않았다는 가장 솔직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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