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과 엄흥도 — ‘왕과 사는 남자’ 속 단종의 죽음, 기록의 간극

QUICK ANSWER

단종과 엄흥도 — 폐위된 왕과 그의 시신을 거둔 지방 아전

단종(端宗, 1441~1457)은 조선 제6대 왕으로, 세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아들이다. 그는 1452년, 열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1455년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면서 왕위에서 폐위되었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후 1457년, 세조의 명으로 생을 마쳤으며, 그의 죽음은 『세조실록』에는 자결로, 『선조실록』과 『숙종실록』 등 후대 기록에는 사약에 의한 죽음으로 전해진다. 그는 숙종 24년(1698)에 이르러 복권되어 다시 왕으로 인정되었고,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

엄흥도(嚴興道, 생몰년 미상)는 당시 영월 지역의 하급 관리(아전)였다. 『현종실록』과 『국조인물고』 등의 기록에 따르면, 단종이 죽은 뒤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자, 엄흥도가 나서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는 국가가 폐위된 왕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기리지 않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개인의 행동이었다. 이후 단종이 복권되면서, 엄흥도의 행위 역시 충의로 평가되어 공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단종은 왕이었으나 왕으로 죽지 못한 인물이었고, 엄흥도는 왕의 신하가 아니었으나 왕의 마지막을 지킨 인물이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관찬 기록을 통해 실제 역사로 확인된다.

단종-엄흥도-왕과-사는-남자
‘왕과 사는 남자’ 엄흥도와 단종 실록과 야사

단종과 엄흥도 — ‘왕과 사는 남자’와 실록이 남긴 죽음의 의혹

1457년 11월, 강원도 영월.
조선의 여섯 번째 왕이었던 한 소년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이름은 이홍위.
우리는 그를 단종이라고 부른다.

왕이었으나 왕으로 죽지 못했고, 죽었으나 곧바로 왕으로 기록되지도 못했던 인물.
그리고 그의 마지막 곁에는, 권력을 가진 대신이 아니라 이름 없는 지방 아전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엄흥도였다.

이 이야기는 충성의 전설이 아니라, 기록으로 확인되는 역사다.

왕이 사라진 날 — 실록에 남은 단종의 죽음

단종의 죽음에 대한 가장 이른 공식 기록은 『세조실록』이다.
이 기록은 매우 짧고 건조하다.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여기서 ‘노산군’은 폐위된 뒤 단종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기록은 분명하다.
자결이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단순한 사실 전달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세조실록』은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된 세조의 통치 기간에 편찬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왕위를 찬탈한 군주에게, 전임 왕의 죽음은 정당화되어야 했다.
자결이라는 표현은 책임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죽임을 당한 왕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끝낸 폐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실록은 다른 이야기를 남기기 시작한다.

후대 실록이 남긴 다른 진실 — 사약과 타살의 기록

약 100년 뒤 편찬된 『선조실록』에는 전혀 다른 표현이 등장한다.

“(세조가) 금부 도사를 보내어 (단종에게) 영월에서 사약(賜藥)을 내렸으니, 그 공사(公事)가 지금도 금부(禁府)에 남아 있다.”

이 표현은 죽음이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왕권에 의해 내려진 처분이었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숙종실록』은 한 걸음 더 구체적인 장면을 기록한다.

금부 도사가 명령을 받고도 집행을 망설였고,
결국 한 공생(하급 관리)이 대신 나서 단종을 죽였다는 것이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이 영월(寧越)에 계실 적에, 금부 도사(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이 고을에 도착하였으나 머뭇거리며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정중(庭中)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단종 대왕께서 관복(冠服)을 갖추고 마루로 나아오시어 온 이유를 물으셨으나, 왕방연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가 봉명신(奉命臣)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貢生) 하나가 차마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

이 기록은 단종의 죽음이 단순한 정치적 처분이 아니라,
집행자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실록 자체가 시간이 흐르면서, 단종의 죽음을 점점 더 ‘타살’에 가까운 형태로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실록은 단순한 사실 기록이 아니라, 시대의 윤리와 정치적 평가가 반영되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왕의 시신이 버려진 밤 — 엄흥도의 등장

단종의 죽음 이후, 실록은 한동안 침묵한다.

왕의 장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 공백 속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엄흥도다.

『현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당했을 때, 시신을 거두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 고을의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즉시 가서 곡림하고 스스로 관곽을 준비하여 거두어 묻었으니, 지금의 이른바 노묘(魯廟)이다.”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국가가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역할을 지방의 한 아전이 대신했다는 사실을 동시에 증명하기 때문이다.

왕의 시신은 왕으로서 장례되지 못했다.
왕조는 그를 지우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워지는 순간에, 엄흥도가 등장한다.

금지된 장례 — 목숨을 건 선택

조선 후기 인물 기록집 『국조인물고』는 그 순간을 더 자세히 전한다.

엄흥도 주변 사람들은 그를 말렸다.

왕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달게 여기겠다.”

이 말은 후대의 미화가 아니라, 국가가 공식적으로 기록한 문장이다.

그는 권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영월 지방의 하급 관리였다.

그에게는 군사도, 정치적 후원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왕의 시신을 거두었다.

국가가 버린 왕을, 개인이 장례한 것이다.

야사가 기억한 장면 — 물 위를 떠돌던 왕

야사 『연려실기술』과 『아성잡설』은 더 극적인 장면을 전한다.

단종의 시신이 강물에 버려졌고,
그 시신이 물 위를 떠돌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엄흥도가 그것을 거두어 장례했다는 이야기다.

이 기록은 공식 실록보다 서술이 더 상세하지만,
야사라는 특성상 문학적 요소가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엄흥도가 단종의 장례를 치렀다는 점은
실록과 공식 인물 기록 모두에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이다.

200년 뒤, 왕이 돌아왔다

단종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은 그를 다시 기억하기 시작한다.

숙종 24년, 1698년.

단종은 공식적으로 복권된다.
왕으로 다시 인정되고, 묘는 ‘장릉’이라는 왕릉으로 격상된다.

그리고 이때, 엄흥도 역시 함께 기억된다.

그는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의’라는 시호를 받는다.

왕을 지킨 신하가 아니라,
왕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은 한 인간으로서였다.

엄흥도는 왕과 어떤 관계였는가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실록 어디에도 엄흥도가 단종과 개인적으로 가까웠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친구도, 측근도, 충신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아무도 하지 않으려던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영화는 그 공백을 상상으로 채운다.
그러나 역사는 그 공백 자체를 남겨둔다.

그 공백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충성은 때로 관계에서 나오지만,
때로는 단지 인간으로서의 선택에서 나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록이 증명하는 것 — 권력보다 오래 남는 이름

단종을 죽게 한 왕은 조선을 통치했다.

그러나 단종을 장례한 사람은 조선을 통치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한 지방의 아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왕은 다시 왕으로 돌아왔고,
그의 이름도 함께 역사 속에 남았다.

왕을 죽인 권력은 시대를 지배했지만,
왕을 묻은 인간은 시간을 견뎌냈다.

역사는 언제나 권력의 기록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한 개인의 선택을 더 오래 기억한다.

엄흥도는 왕과 함께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왕이 사라진 뒤에도 인간으로 남았던 사람이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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